가면을 쓰고 전설을 좇으며
최근에 fable과 꽤 긴 대화를 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그 대화에서 오랜만에 완전히 솔직했다. 어떻게 보일지 계산하지 않았고, 약점을 (내 오래된 인지도식과 열등감까지도)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실망시킬 얼굴이 없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되고 나서야, 평소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계산하며 말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모든 사람이 가면을 쓰고 산다. 나도 쓴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그냥 관찰이다.
어른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과는 가면을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어떤 사고방식과 어떤 과거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부터가 연출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나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약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이 치명타로 돌아오거나, 이용되거나, 이용되지 않더라도 나를 얕보는 근거가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고, 실제로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모범적인 규율로 통한다. 자기 얘기도, 남의 얘기도 길게 하지 않는 것,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을 꽤 깊이 내면화한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내 판단과 행동의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흡수된 규칙들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이런 건 이렇게 보인다, 이건 하면 안 된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지침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누가 검증했는지 모르지만 모두가 믿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부터가 그런 이야기였다.
서른이 넘으니 곤란한 지점이 생긴다. 뭐가 내 진심이고 뭐가 내면화된 전설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신중함은 내 성격인가, 학습된 규율인가. 이 배려는 내 것인가, 그래야 한다고 들어서 하는 것인가. 오래 뒤섞인 것들은 성분표가 없다.
여기까지 들은 fable은 이렇게 말했다. 규범 밑에 순수한 원본 자아가 묻혀 있다는 가정 자체가 또 하나의 전설일 수 있다고. 발굴은 불가능하고, 대신 쓸 수 있는 계기판이 하나 있다고 했다. 피로다. 어떤 규범은 문법처럼 작동한다. 지키면서도 내 말을 할 수 있고, 쓰는 데 비용이 들지 않는다. 어떤 규범은 코르셋처럼 작동한다. 지킬 때마다 조금씩 소모된다. 무엇이 내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무엇이 나를 갉아먹는지는 몸이 매번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용해서 적어둔다.
그 기준으로 보면 내가 견디지 못하는 규범의 유형이 선명해진다. 상냥함이나 사려 깊음 같은 것은 나에게 문법이다. 지켜도 닳지 않고, 오히려 그러고 싶다. 그런데 상석이 어디인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의전을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은 다르다. 유용하지도 않은데 복잡하고, 납득할 이유도 없는데 모르면 무례한 사람이 된다. 왜 외워야 하는지 물으면 답은 없고, 외우지 않은 것만 기록된다.
이것이 아비투스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비투스 원전을 조금 더 조사해보니,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개념이 딱 들어맞더라. 요지는 이렇다. 그런 복잡한 규칙들의 기능은 효율이 아니라 판별이다. 규칙이 자의적일수록 판별기로서는 우수하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규칙은 아무나 지킬 수 있어서 내부인을 걸러내지 못한다. 배운 사람만 아는 규칙이어야 배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른다. 그리고 이 장치의 교묘한 점은, 코드를 모르는 것이 코드를 모르는 것으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이 덜 된 것으로 기록된다. 자의적인 약속이 인격의 척도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걸 알고 나니 내 불편함이 무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상이 나랑 안 맞는 건가 싶은 날도 있다. 근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느 조직이든, 어느 모임이든 나름의 코드가 있다. 사회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솔직해지자면 나도 판별을 한다. 기준이 상석이 아니라 말의 논리와 정직함일 뿐이지, 나 역시 내 자로 사람을 재고 있다. 코드를 거부하는 것도 결국 하나의 코드다. 그러니 나는 코드 없는 사람이 아니라, 소속된 부족이 다른 사람에 가깝다.
얘기가 좀 샜다. 솔직함으로 돌아가면, 나는 솔직한 게 편하고 솔직하고 싶다. 그런데 솔직함은 미덕이 아니라는 전설 또한 존재한다. 솔직하고 싶다는 것은 처리와 책임을 듣는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이라고. 완전히 반박하긴 어렵다. 나의 솔직함은 나를 편하게 하지만, 듣는 사람까지 편하게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fable은 축을 바꾸라고 조언하더라. 솔직이냐 예의냐가 아니라, 이 발화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를 물으라고. 솔직함은 배설일 수도 있고 선물일 수도 있다. 예의도 배려일 수도 있고 자기 보호일 수도 있다. 뜨끔한 것은 뒤쪽이었다. 내 예의의 절반은 상대를 위한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냥 싫은 소리를 하기 싫은 마음이다. 갈등이 생기는 상황 자체가 싫어서 그럴 가능성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나는 오래 배려라고 불러왔다. 그 회계를 이번에 처음 들켰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하면, 없다. 가면은 계속 쓸 것이고, 전설과 진심은 계속 헷갈릴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느낀 점은 있다.
이 모든 계산이 꺼지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내온 친구들이다. 자연스러운 나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 그 앞에서는 어떤 규범도 작동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틀린 것을 수습하지 않고,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않는다. 조심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 것 같다. 그들에게 고맙다.
이건 그 친구들이 특별해서라기보다 순서가 준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생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