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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없는 업무에서 판단한다는 것

정답이 없는 일에서 판단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고 검증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2026-05-10 관련 작업 · 비전공자로 시작한 CDM 연구와 SCI 1저자 논문

어떤 일은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든다.

처음 요청은 대개 간단해 보인다.

자료를 정리해달라.
일정을 잡아달라.
기준을 정해달라.
방향을 제안해달라.

그런데 막상 앉아서 일을 시작하면, 이 요청들은 답이 아니라 기준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디까지가 이번 일의 범위인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가.
누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가.
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가.
지금 결정해야 하는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잘 정의된 문제라면 풀면 된다. 조건이 명확하고, 기준이 있고, 답이 맞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업무는 처음부터 그렇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준은 불완전하고, 이해관계자는 여러 명이며,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일단 판단해야 한다.

이때 판단은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니다.

문제를 실행 가능한 크기로 좁히는 일이다.

정답이 없는 일에서 필요한 것은 완벽한 확신이 아니다. 책임 있는 임시성이다.

임시적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의 정보로 설명 가능한 기준을 세우고, 무엇이 아직 불확실한지 표시하고,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남기는 태도다.

나는 이런 업무를 마주할 때 아래의 다섯 가지를 먼저 본다. 순서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들이 빠지면 판단은 쉽게 감이나 취향의 문제가 된다.

확인할 것 묻는 질문 판단에서 하는 역할
목적 이 일은 무엇을 위해 하는가. 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제약 지금 바꿀 수 없는 조건은 무엇인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좁힌다.
책임 누가 의견을 내고, 누가 결정하고, 누가 실행하는가. 논의할 것과 실행할 것을 구분한다.
가역성 틀렸을 때 되돌릴 수 있는가. 결정의 무게를 조절한다.
검증 시점 언제 다시 볼 것인가. 임시 판단을 학습 가능한 판단으로 만든다.

같은 자료 정리라도 보고를 위한 것인지, 인수인계를 위한 것인지, 의사결정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같은 일정 조율이라도 속도가 중요한지, 참여율이 중요한지, 책임자의 확인이 중요한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진다.

제약을 보지 않으면 말은 쉬워진다. 책임을 나누지 않으면 의견 요청과 결정 위임이 뒤섞인다. 되돌릴 수 있는 일까지 너무 무겁게 다루면 일이 늦어지고, 되돌리기 어려운 일을 가볍게 다루면 나중에 더 큰 비용을 낸다.

그래서 임시 판단에는 다시 볼 시점이 필요하다. 판단은 한 번 내려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시점에 다시 현실과 맞춰보아야 한다. 그때 처음 기준이 맞았는지, 정보가 달라졌는지, 위험이 커졌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면 판단은 거창한 통찰이 아니라 정리의 기술에 가깝다. 무엇을 위해 하는지 보고, 무엇을 바꿀 수 없는지 확인하고, 누가 결정하는지 나누고, 되돌릴 수 있는지 살피고, 다시 볼 시점을 남기는 것. 아주 기본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기본이 빠질 때 일이 흔들린다.

정답이 없는 업무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확실한 일을 너무 확실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일을 멈추게 하고, 후자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좋은 판단은 그 사이에 있다. 아직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되, 지금 정할 수 있는 것은 정한다. 열어둘 것은 열어두되, 실행할 것은 실행한다. 의견을 받을 부분과 결정된 부분을 구분한다.

그래서 좋은 판단은 나중에 다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결과가 나온 뒤에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처음부터 기준을 더 명확히 했어야 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 알게 된 정보를 알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사후 평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판단 근거를 남겨두는 일이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가.
그때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무엇은 아직 몰랐는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가.
언제 다시 보기로 했는가.

이 질문들이 남아 있으면 실패도 학습이 된다. 반대로 아무 기준 없이 흘러간 일은 결과가 좋으면 운이 되고, 결과가 나쁘면 책임 공방이 된다.

정답이 없는 업무에서 판단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다.

모호한 상황을 실행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일이다.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좋은 판단은 모든 변수를 아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변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지금 움직일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정리하는 데서 나온다.

지금의 정보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이 임시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며, 나중에 다시 검증할 수 있게 남기는 일.

나는 그것이 현장에서 말하는 판단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